2012. 2. 12. 12:31ㆍ생활여행자의 일기
*2007년 여름에 복태와 지리산을 다녀와 썼던 글. 벌써 5년이 지났다.
아침부터 세석 대피소의 등산객들이 분주하다.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에 비가 내리기 전 천왕봉을 오르려는 생각에
바쁘게 아침식사를 하고 서둘러 떠난다.
어젯밤 같은 테이블에서 함께 식사했던 분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복태와 나도 출발한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산을 더럽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마음이 넉넉한 것도 사실이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언가를 줄 것이 없을까, 상대방에게 이것이 필요하지 않을까를
고심하는 듯하다.
이런 분들 때문에 복태와 나의 산행은 더 즐겁고 풍족해졌다.
날씨도 흐리고 공기도 서늘하기에 얇은 점퍼를 입고 산행을 시작했으나
세석 대피소의 아저씨 말대로 촛대봉에 오르기도 전에 땀이 난다.
역시 여름은 여름인가 보다.
장터목대피소까지 가는 길은 능선 산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산능선 양 옆으로 펼쳐진 지리산의 모습에 감탄이 끊이지 않는다.
포근하게 깔린 운해, 공기 속의 물기를 머금은 듯한 초록빛, 드문드문 고사목,
시선 바로 아래의 색색깔의 꽃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셔터를 누르고 나도 이내 바쁘지만
때론 내 두 눈으로만 담으려고 말없이 한동안 바라보기도 한다.
장터목 대피소가 있는 장터목은 옛날 장이 섰던 곳이라 해서 이름붙여졌다.
어느쪽 하산길이라도 적어도 서너시간은 걸리는데, 물건들을 지고 올라와 장을 펼쳤을 모습을
상상하니 대단하다 싶은 생각과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공기가 있었으려니 싶다.
힘들게 올라왔지만 산 꼭대기의 휴식처는 사람들에게 힘들었던 순간을 순식간에 잊게 하는
힘이 있으니, 그때 그 사람들도 마음이 너무나 넉넉해져서 에누리에 덤이 그득했던
장터가 아니었을까.
장터목에 배낭을 내려놓고 가벼운 상태로 천왕봉에 오른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는 통천문을 지나 계단도 오르고 바위도 오르니
해발 1915미터의 천왕봉이 구름 사이에 희미하게 보인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구름이 많이 껴 있어서
우리가 엊그제부터 걸어온 길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저 저 즈음에 노고단이 있을테고, 연하봉이 있을테고
안내판을 보며 짐작할 밖에.
30여 명의 ROTC 군인들이 씩씩하게 하산한다.
-훈련하는 건가요?
-산책입니다, 산책!
다시 장터목으로 내려와 미숫가루와 빵, 초콜렛 등으로 간단한 점심식사를 하고
중산리 쪽으로 하산한다.
지금까지보다 등산객이 현저히 적다.
하산하는 도중 겨우 일곱명 정도를 만났을 뿐.
중산리 쪽으로의 계곡 하산길은 지루하게 바위가 쌓여 있는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잠시 발담그고 쉴 폭포수도 있고,
하산하는 내내 들리는 물소리와
시야가 트일 때마다 볼 수 있는 맑고 쨍한 물들이
피로를 덜어준다.
세석에서 만났던 한 아저씨가 지리산에 혼자 몇개월 살 때
왼쪽으로 흐르는 물은 스님이 염불 외는 소리처럼 들리고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은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처럼 들렸다고 말씀하셨는데
집으로 돌아가면 이 물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것 같다.
환청처럼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여섯시가 거의 다 되어 중산리 쪽 야영장으로 내려왔다.
야영장에서 마신 물은 어쩐지 미지근하다.
산에서 특히 선비샘에서 마신 물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이렇게, 힘들면 곧장 내려와야지 하고 배수진을 쳤던 산행이
2박3일로 이어졌고,
다시 내려올 걸 뭐하러 올라가냐는 사람들의 타박도 듣고
어이없게 구름에 가린 햇빛에 손과 다리가 까맣게 그을려버렸지만
지금까지의 어떤 산행보다 가장 즐거웠던 산행이었다.
등산할 때마다 되뇌었던
다시는 산에 가지 않을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2박3일이었고
지리산에 보여주는 모습 하나하나는
나무 구석에 조용히 자라던 이름모를 버섯 하나까지도 감동이었다.
지리산과 지리산에서 만난 모든 생명들, 많은 사람들을 통해
체험학습을 했던 2박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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