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_1

2012. 2. 12. 12:27생활여행자의 일기

*2007년 여름에 복태와 지리산을 다녀와 썼던 글. 벌써 5년이 지났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시인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 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나는 누가 산을 좋아하느냐 물으면 '그렇다'고 답은 하면서도

정작 등산을 할 때면 '미쳤다고 여길 또 왔네' 후회를 이내 하는

엉터리 등산 애호가이다.

내가 왜 산에 종종 가고 싶어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사람들이 등산을 하려는 이유도 정말 모르겠는데

나는 늘 산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이번 방학에도 역시 산을 마음에 품다가 지리산을 점찍었다.

일단은 천왕봉까지 가는걸로 계획하지만 가다가 힘들면 내려오자,

나는 종주가 목표는 아니야, 산을 즐기다가 즐기지 못할만큼 몸이 힘들어지면 그냥 내려오는거다

등등 계획인지, 힘들 것임에 분명하니까 미리 배수진을 쳤던 건지 모르게

날짜를 잡고 대피소를 예약하고 가방을 꾸렸다.

 

 

---지리산 산행---

7월 21일 수원발 구례구행 막차(pm11:19)로 출발, 24일 진주발 남부터미널행 막차(pm12:00)로 도착.

 

22일(일)  약 16km

성삼재-노고단-임걸령-노루목-(반야봉)-삼도봉-화개재-(뱀사골대피소)-토끼봉-연하천(1박)

 

23일(월)  약 9.9km

연하천-형제봉-벽소령-세석(2박)

 

24일(화) 약 12.1km

세석-장터목-천왕봉-장터목-중산리

 

 

동행 : 박복태, 대학 선배이자 친구.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 북한산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새벽 3시 20분 쯤 구례구역에 도착하자 구례터미널로 향하는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30분에 출발하는 단 하나뿐인 버스는 등산객들로 가득하다. 구례터미널을 잠시 들렀다가 4시, 버스는 성삼재휴게소로 향한다. 아직 어두운 구불구불한 산길을 이십여분 달리자 휴게소에 도착했고, 버스에서 내린 등산객들은 신발끈을 단단히 고쳐 매고 서둘러 출발한다.

 

우리의 산행 계획이 천천히 산을 즐기면서 오르자, 였기에 복태와 나는 새벽하늘의 별을 감상하며 천천히 여유롭게 걷는다. 산행에서의 여유로움이 어떤 대가로 돌아오는지 이땐 미처 몰랐지만...

노고단 대피소까지 가는 길에 아침해는 떠오르고, 잠시 구례시가지 쪽 불빛과 운해를 감상하며 간단한 요기를 한다.

작년 여름에 노고단에 와보고 1년만인데 그사이 시인마을이라는 것이 생겼다. (작년에도 있었는데 못 보고 지나친 것일 수도 있지만..) 몇몇 시인들의 시를 시집으로 엮어 등산객들에게 빌려주고 각 대피소에 마련된 시인마을에 반납하면 되는 것. 얇아서 한 권 배낭에 넣어 가다가 뱀사골 대피소에서 두어시간 퍼져 쉴 때 읽으니 기분 좋더라.

 

노고단은 여러번 와봤지만 늘 노고단까지만 오르고 대피소쪽 하산길로 내려왔는데, 천왕봉 쪽 등산로로 가기는 처음이라 기분이 남달랐다. 뭔가 진짜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달까. 노고단에서 아침 일출을 본 사람들은 날씨가 좋아 장관을 봤다며 자랑이다. 올라오는 길에 운해 감상하느라 일출은 놓쳐버렸지만 별로 아쉽지는 않다. 다음에 또 보러 오지 뭐...

 

뱀사골대피소까지 가는 길은 한사람이 걸어갈만한 폭의 등산로가 많다. 빽빽한 숲에 난 길을 걸으며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도 만져보고, 복태와 다른 등산객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눈다. 가끔 시야가 트인 곳으로는 구름에 둘러싸인 산풍경과 시원한 산바람이 밀려들어온다.

곧 폐쇄될 예정이라는 뱀사골 대피소에서 두어시간 휴식을 취한다. 햇반과 준비해온 반찬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의자에 길게 누워 밤기차에서 제대로 청하지 못한 잠도 짧게나마 자고, 일기도 쓴다.

 

여전히 풀지 못한 퀘스천마크이다. 사람들은 왜 산을 오르는 것일까?

익숙치 않은 등산화에 눌려 발목이 발갛게 붓고, 대피소로 내려오는 계단에서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구름과 땀에 티셔츠와 바지, 속옷까지 젖었다 말려지기를 여러번.

나는 왜 또 산에 온 것일까?

 

1. 사실 나는 마조히즘적 성향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고상하게 즐기려고 산을 선택한 것일까

2. 나 말고는 아무도 내 행동에 책임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걸까...

 

뱀사골대피소에서 세시간 반만 내려가면 하산이라는 표지판에 확 내려가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면서도

다시금 짐을 꾸리고 있는 나였다.

 

산은 고통과 책임감, 자립심을 안겨주는 곳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운해 그 장관과 자연이 선사한 위대한 순간을
먼저 떠올리게끔 하는 그런 곳이다.

 

뱀사골을 출발해, 고통의 진수를 맛보게 해주었던 토끼봉을 지나 연하천에 다다르자 맥이 풀린다. 
토끼봉이 왜 토끼봉이라는 이름을 가졌는지에 대해 복태와 수많은 추측을 해보았지만
이렇다할 답을 얻지 못한 채 
토끼봉은 등산하기에 힘듦, 그 노고를 완화시키려고 귀엽게 이름지었을 뿐이라 단정짓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연하천에서의 밤은 자연의 시간과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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