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12. 12:30ㆍ생활여행자의 일기
연하천 대피소에서의 아침 역시 일출과 함께 시작이다.
사람들은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늘의 산행을 준비하고는 곧 떠난다.
연하천 대피소의 소장님은 지리산 국립공원을 정말 사랑하는 분인것 같다.
이 분 때문에 어제까지 내 등산에 무거운 짐일 뿐이었던 쓰레기가
내가 짊어지고 내려가야 할 책임으로 다가온다.
대피소를 떠나기 전 소장님과 기념촬영을 하고 쓰레기 봉투를 받는다.
가는 길에 지리산에 사람들이 버린 양심을 줍겠다는 약속과 함께.
지리산 곳곳에서는 곰 출현지역이라는 경고문과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는 안내문을 많이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때문에 지리산의 곰은 쓰레기더미를 뒤지게 되고,
사람들이 먹는 달콤한 음식 때문에 지리산의 곰 이빨은 썩게 된다.
과일껍질은 으레 쓰레기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거리낌없이 산에 버리게 되지만
과일껍질 역시 쓰레기이다.
파리가 꼬이는 주범인데다 야생동물에게도 안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튿날의 산행은 그렇게 지리산의 쓰레기를 주으며 시작됐다.
오며가며 만난 등산객들은 우리들에게 좋은 일을 한다며 칭찬해주었지만
사실 애초부터 쓰레기를 줍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연하천 대피소 소장님과의 약속 때문에 시작한 것 인데다
쓰레기를 주으면 주을수록 등산객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 더해져
보람있지만 유쾌하지만은 않은 경험이었다.
잘 보이지 않는 풀숲에 라면봉지며 깡통 등을 투기한 장면을 보았을 때는
인간에 대한 실망감마저 들었다.
이튿날의 산행 일정은 벽소령대피소를 지나 선비샘, 세석을 거쳐 장터목 대피소까지 가는 것이었으나
쓰레기 때문인지, 등산객들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체력 때문인지
지친 나머지 세석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가는 길에 만난 선비샘은 그 물맛이 어찌나 시원하고 맛있던지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등산객들은 오며가며 혹은 약수터에서 잠시 지친 다리를 쉬며 이야기를 나눈다.
안녕하세요
어디로 가세요?
얼마나 남았나요
조금 더 가면 쉴만한 곳이 있어요
수고하세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묻는다. 때론 사탕이나 초콜렛을 나누기도 하면서.
지리산에는 파리가 정말 많다. 처음에는 생김새 때문에 벌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검은빰금파리''라는 고산지역에 사는 파리였다.
앉아서 쉴라치면 많은 파리들이 달콤함을 찾아 내 손을 훑는다.
벌인줄 알았을 때는 쫓아내기 바빴는데, 침을 쏘지 않는 파리라는 걸 알고나니 그저 귀찮을 뿐,
내버려두면 어느새 팔과 다리를 족히 이십마리 정도가 덮고 있다.
형제봉을 앞두고 시야가 트인 바위에 누워 한두시간을 휴식하며 명상도, 스트레칭도 하고
벽소령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장터목까지 갈 것이라 하니까 벽소령 대피소의 아저씨가
우리들이 너무 여유를 부린다며 타박이시다.
결국 다섯시 경 세석대피소에 도착, 오늘은 이곳에서 묵기로 한다.
세석대피소에서 어젯밤 연하천대피소에서 만났던 등산객들도 다시 만나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식사를 한다.
같은 테이블을 사용했던 아저씨가 茶 매니아였던 덕에
식사 후 황차라는 차를 마셔볼 수 있었다.
''술에만 취하는 게 아닙니다. 차에도 한번 취해 보세요.''
지리산의 맑은 물로 끓인 차였으니 그 맛이 다른 데서 맛볼 수 없는 맛이었을 거다.
세석에서의 밤은 그렇게 여러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얻고 배우며 짙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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