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3. 06:28ㆍ호랑방탕 가사탕진 여행/지중해_여기저기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9일간 함께 여행했던 선생님들과 아쉬운 인사를 마치고 시내로 돌아오는 전철에 올랐다.
내일 모레 아테네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바르셀로나에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있다.
카탈루냐 국립 미술관, 카탈루냐 음악당, 고딕 지구 꼼꼼히 다시 보기, 피게레스 달리극장박물관, 몬세라트 트레킹 다른 코스에 도전, 채식 식당 가보기, 구엘 공원 아침 산책, 못 가봤던 타파스 바 한 번 촤르륵 훑어보기 등등…
이틀의 여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고픈 일들을 적어보니 한없이 짧기만 하다.
우선순위를 정해보면,
- 피게레스 달리극장박물관
- 고딕 지구 꼼꼼히 보기
- 채식 식당 가보기
일단 세 가지는 꼭 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시간되고 에너지 남아 있으면 도전해 보기로 한다.
그러고 나서 날짜를 확인해보니 하필 오늘이 일요일! 만세! -_-;;; 내일(월요일)은 달리극장박물관을 비롯해 카탈루냐 국립미술관이 모두 문을 닫는다. 카탈루냐 미술관은 시내에서 가까워 다음에 왔을 때 쉽게 갈 수 있을테니 달리 미술관을 가기로 결정. 공항에서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산츠 역에서 내려 피게레스행 기차표를 샀다.
>>Barcelona Santz - Figuerres Valant 구간은 고속열차인 AVE를 이용하면 50분 만에 도착한다.
성인 21유로(편도)
달리극장박물관 입구.쪽 "갈라와 달리의 광장"에서 바라본 모습
박물관 측면에서 본 모습. 건물 중앙의 유리돔.
초현실주의의 상징, 살바도르 달리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피게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 동안 프랑스에서 작업을 한 기간도 있고, 미국에서 살았던 시간들도 있지만 세례를 받은 곳도 장례를 치른 곳도 이곳 피게레스이다. 게다가 사후 유해도 이곳에 묻히게 된다. 박물관은 건물 그 자체로 피게레스 시의 상징이 되었다.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자신이 상상한 모든 이미지들을 죄다 시각화해버린 달리답게 박물관 건물이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초현실주의 작품이다. 오스카 상의 트로피처럼 생긴 달리의 조각상이 건물의 가장자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고, 중앙에는 유리돔이 빛난다.
“다른 세상은 존재한다. 바로 이 지구에, 우리 가까이에 있다.
환각을 일으키는, 새로운 초현실주의의 세상을 담고 있는 달리 박물관의 유리돔 중앙에 있다”
라고 달리가 말했는데, 그 유리돔이 바로 저것이다.
박물관에 도착하기 전, 성페레 교회당과 광장. 달리는 이 교회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르게 된다.
박물관 주변을 걸으며 달리 작품을 만나기 전 워밍업을 한다. 중세의 모습이 남아 있는 여느 스페인 도시처럼 좁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광장이 나오고 또 다시 길이 이어진다. 박물관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는 성 페레 교회당 Esglesia de Sant Pere는 9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지어졌던 건물이다. 1701년 펠리페 5세와 왕비 마리아가 이 교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고 초반 몇 달만에 교회당은 불타 거의 파괴되었고 교구기록(교회당에서 열린 결혼식이나 세례에 대한 기록 등) 역시 상당부분 사라져버렸다. 1941년에서 48년 사이 네오고딕 스타일로 재건축되었으며 이 때 건축 노동자들은 수감되어 있던 공화당파 정치범들이었다고 한다. 달리는 이 교회당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르게 된다.
교회당 바로 맞은편에 피게레스 공립 극장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역시 스페인 내전 때 불타버렸다. 재건 계획을 세우며 당시 피게레스 시장이 달리에게 전시실을 하나 마련해 줄테니 작품을 기증해 달라 제안한다. 호탕한 달리는 본인의 작품 전체를 기증하겠다고 말한 뒤 바로 피게레스 공립 극장을 보수해서 박물관으로 만들자고 역제안을 한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최적의 도시가 바로 달리가 태어난 피게레스라고 생각했고, 극장 바로 맞은편에는 달리가 세례를 받았던 성 페레 교회당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달리가 최초로 본인의 드로잉을 전시했던 공간이 바로 이 극장의 로비였다는 이유를 들어 박물관 건립을 추진한 것이다. 그렇게 완성되어 1974년 오픈하게 된 이 건물의 이름은 미술관이 아니라 달리극장박물관이 된다. 달리는 1전시실부터 18전시실까지 내부 공간 디자인에도 직접 참여했고 이곳에서 심지어 살기까지 한다. 이후 갈라-달리 재단의 소장품을 전시할 공간의 필요성에 의해 점차 박물관이 확장되어 현재는 두 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 형태가 되었다.
>>달리극장박물관 Dali Theatre Museum 입장료는 성인 14유로
극장을 개조해서인지 독특한 전시 공간이 많다. 위 사진은 둥그런 홀 형태의 전시공간.
달리 작품은 아니고 친구였던 Evarist Valles라는 카탈란 출신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
작품을 전시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연극적인 제스쳐를 잘 알고 잘 활용했던 달리. 달리답다!라고 생각했던 전시실.
유리돔으로 가기 전에는 중정을 활용한 전시 공간도 있었다. 한 컷으로 담기 어려웠던 작품.
Car Naval. Rainy Taxi. 1974-1985
여느 미술관과 다르게 극장을 개조해 만든 전시공간이어서 동선이 특이하다. 동그란 복도형의 갤러리를 지나기도 하고, 비상구 같은 구석에 그림이 걸려 있기도 하다. 중정과 내부형 베란다 같은 공간에도 달리의 초현실적이고도 사실적인 작품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그저 전시실에 매겨진 숫자의 흐름대로(1전시실부터 22전시실까지) 산책하듯 달리 작품을 감상하며 둘러보면 된다. 그러다보면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게도, 우와! 감탄을 하게도 하는 달리의 상상 속 세계를 만나게 된다. 달리의 시선을 빌려서 잠시나마 세상을 보게 된다.
달리 작품 중 가장 알려진 기억의 지속성. 위 사진은 원본은 아니고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한 태피스트리다.
그림은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소장중. 흐느적거리는 시계가 올리브 나뭇가지에 축 걸쳐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고기 같은 생명체가 바닥에 누워 있다.
이 물고기는 달리가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은 것이라고도 한다.
달리는 자신이 그린 이런 초현실적인 그림을 "손으로 그린 꿈의 사진들"이라고 표현했다.
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1934-35에 걸쳐 그린 달리의 그림 Portrait of Mae West 을 건축가 Oscar Tusquets Blaca 가 공간에서 풀어낸 작품.
그림은 현재 The Are Institute of Chicago에 소장되어 있다.
제2차세계대전(1939년 9월 1일~1945년 9월 2일) 발발 직전의 시기이자 스페인 내전(1936년 7월 17일~1939년 4월 1일)이 한창이던 때 그린 그림.
발달된 최신 기술이 전쟁에 투입되었으나 신기술을 어떻게 잘 사용하는지,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지 알아채지 못한 몽매한 인간들이
전쟁의 참상을 만들어냈음을 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전화 수화기로 표현한 그림이다.
Imperial Violets 1938
미국에서 작업하던 시절 그린 그림.
가죽같은 질감의 축 늘어진 미국 지형이 시계탑에 걸려 있고,
전면의 두 사람 사이에는 코카콜라병이 그려져 있다.흰 천 위의 까만 얼룩이 코카콜라병과 이어져 있다.
소통의 불통, 미국의 인종 문제 등을 표현한 것이라는데 잘 모르겠다...
The Poetry of America 1943
익숙한 이미지인 링컨 초상화이지만 가까이 보면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갈라의 뒷모습 누드화이다.
달리는 이 그림을 마크 로스코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그렸다고 한다.
마크 로스코는 화면을 가득 채운 경계 없는 색채로 유명한 화가.
Gala Nude looking at the sea which at 18 meters appears the president Lincoln 1975
달리는 말년에 미켈란젤로에 심취해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위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때는 1982년 갈라가 죽은 해에 달리의 우울하고 유약한 심리 상태가 드러난 작품이라고 평가 받는 그림.
나는 왠지 마음이 착 가라앉으며 편해졌던 그림이었다. 달리의 체념이 전해진걸까?
Geological Echo. La Pieta 1982
달리극장박물관의 입구 쪽 광장의 이름은 “갈라와 달리 광장”이다. 갈라는 달리가 평생을 사랑한 여인이었다. 달리의 사랑은 유아적이고 순정적이었다고 한다. 달리가 시인 로르카와 동성 연인관계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달리가 갈라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사실 갈라와 달리가 처음 만났을 때 갈라는 시인 폴 엘뤼아르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지만 달리의 구애에 함께 살게 되고 아들도 낳고 알콩달콩 잘 살다가 갈라의 전남편이 죽어서야 교회에서 둘의 결혼을 인정받게 된다. 갈라는 달리의 뮤즈이자 훌륭한 매니저였다는 평가도 있고, 작품에도 많이 등장한다. 연도가 높아질수록 갈라의 모습도 조금씩 나이가 드는데, 달리는 끊임없이 갈라를 그렸다. 그 그림들이 좋았다. 갈라의 발을 그리고, 갈라의 뒷모습을 그리고, 정면을 그리고, 갈라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어서 지중해를 들어올리는 달리의 모습을 그렸다. 갈라는 1982년 사망하게 되는데, 갈라의 사망 이후 달리는 엄청나게 괴로워했는데, 자살시도로 보이는 화재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라파엘의 연인 라 포르나리나에서 차용, 달리는 이 그림을 그리고 제목을 '갈라리나'라고 짓는다.
젊은 갈라. 달리가 경탄하면서 그렸을 갈라라고 생각하니 아름답다.
절대적인 아름다움보다 의미를 부여한 아름다움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왼쪽. Galarina 1945
실제로 여섯개의 거울을 가져다두고 갈라의 뒷모습을 그리는 달리 자신의 모습까지 담은 그림.
70대의 달리가 80대의 갈라를 그리고 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라스메니나스>에서처럼 거울 효과를 이용해
모델 뿐만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작가 자신도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을 계획하면서 달리는 얼마나 즐거웠을까? 거울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시도해 봤을 생각을 하니 할아버지 달리가 귀엽게 느껴진다.
Dali seen from the back painting Gala from the back eternalized by six virtual corneas provisionally reflected by six real mirrors 1972-1973
자신의 천재성을 확신했고, 당당했고, 재능을 다방면에 걸쳐 펼친(그림 뿐만 아니라 영화도 찍고, 보석 디자인 및 무대와 의상 디자인도 한다) 달리는 1989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장례식은 피게레스의 성페레 교회당에서 치러졌고, 유해는 달리극장박물관에 안치되었다. 실제로 반지하층에 위치한 달리가 디자인한 보석들이 전시되어 있는 어둡지만 화려한 제7전시실에 달리의 무덤이 있다. 이 또한 얼마나 연극적인 퍼포먼스를 즐겨 하던 달리다운지! 자신의 죽음마저 초현실주의의 작품으로 만들어버린 듯한 달리의 무덤은 바닥에 놓여진 것이 아니라 마치 작품이 전시되어 있을 법한 높이에 안치되어 있다. 죽어서도 예의 그 살짝 내리깔듯한 눈빛으로 관람객들을 주시하고 있을 것 같은 달리의 묘를 잠시 감상(!)하고 박물관을 나섰다.
달리의 본명은 '살바도르 도밍고 펠리페 하신토 달리 이 도메네크'이다.
1904년 5월 11일 피게레스에서 태어나 1984년 1월 23일 사망했다.
- 기차역에서 달리 박물관까지는 4km정도 떨어져 있다. 역 바로 앞에서 박물관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다니니 타도 좋고(1.2유로), 천천히 걸어봐도 좋다.
- 달리극장박물관 바로 옆에 달리가 디자인한 보석을 볼 수 있는 박물관도 있다. 극장박물관 티켓에 입장권이 포함되어 있다.
- 우연히도 오늘(1월 23일)이 달리가 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달리는 1989년 1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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