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15. 06:31ㆍ호랑방탕 가사탕진 여행/지중해_여기저기
그림은 재밌다.
알고 보면 더 재밌을 수도 있지만 모르고 봐도 재밌다.
같은 그림도 볼 때의 나의 마음과 상태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안 보이던 것들이 문득 보일 때가 있다.
혼자 여행할 때 미술관만큼 좋은 곳도 없다. 그림이랑 대화하듯, 작가랑 대화하듯 그림을 본다. 질문이 생겨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기(이미 죽었기) 때문에 ㅎㅎ 내 상상으로 대신 답을 해보기도 한다. 내 마음대로 평가도 해본다.
#무리요
무리요의 그림은 보기 좋다. 편하다.
이 화가는 그림만으로 보면 내면의 격동이 없는 것 같다. 조실부모하고 부인도 일찍 죽고 삶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지만…
흔히 르네상스와 바로크로 불리는 시기의 특징적인 그림들을 볼 때 난 그림을 비추는 조명이 촛불이라고 상상을 하며 작품을 본다. 안그래도 극적인 그림들이 일렁이는 불빛에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였을 것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화가들이 의도한 효과 +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을 이렇게 상상으로 경험해본다.
그런데 무리요의 그림은 감정을 극대화시켜 종교적인 희열을 불러일으키려는 뒤틀린 묘사, 과장된 신체 표현이 그 특징이 아니다.
무리요가 많이 그렸다는 아이들, 아기 천사, 성모 마리아로 표현되는 젊은 여인상을 보면 부드럽고 아름답다. 마치 화가가 평면 캔버스에 온도를 표현하려는 것 같다.
일렁이는 촛불 아래를 상상해본다면? 더 포근해지는 따뜻한 그림이다.
무리요는 수바란, 루벤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수바란이 잘하는 명암의 강한 표현(바로크의 특징), 루벤스의 밝고 역동적인 표현등이 무리요의 작품에서 보이기는하나 수르바란과 루벤스의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온함, 따뜻함, 거기서 오는 위로를 무리요의 그림에서는 느낄 수 있다. 루벤스 그림이 화사한 면이 있긴 하지만 늘 과하다싶은 느낌도 사실이다. 네로 미안…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와 아기> 이미지출처 : 위키미디어
아기(예수일까?)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카푸친 성인의 손에서 종교를 떠난 위안을 느낀다. 아기천사들과 아기까지 퍼져 있는 밝고 따뜻한 빛이 그림 앞의 공간에까지 전해지는 것 같다.
이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낮은 자세로 아기를 감싸는 카푸친 성인의 모습을 그린 종교화이지만 종교를 떠나 자기가 가진 작고 소박한 것으로 상대를 감싸는 따스함으로 이 그림이 읽혔다. 성 안토니오 뿐만이 아니라 아기도 상대방을 감싸고 있다.
*카푸친 수도회의 특징은 머리 스타일과 검소한 수도사 복장. 머리 중앙은 밀고 테두리만 머리카락을 남긴 스타일(금욕하기 위해 일부러 웃긴, 남자로서의 매력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머리스타일을 고안했다고 함)을 닮은 커피가 바로 중앙은 우유커품 때문에 하얗고 테두리만 커피 때문에 갈색으로 보이는 카푸치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가진 것을 더 내려놓고 오직 기도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는 수도회.
무리요는 세비야 혹은 세비야 인근 작은 마을 출신으로 죽을 때까지 세비야에 살았다. 지금은 벨라스케스가 세비야 출신의 그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훨씬 더 유명하지만 당대에는 무리요의 작품이 왕명으로 스페인 국외 반출이 금지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국외 반출 금지라는 왕명(사실이라면) 이면에는 좀 더 복잡한 이유가 있을 것도 같다.
무리요는 거리의 거지 아이들을 아름답게 그린 걸로도 유명한데, 세비야 미술관에는 주로 종교화가 남아 있다. 특히 무리요 탄생 400주년을 맞이해 쾰른에서 빌려온 <Jubliee of the Porciuncula>가 2026년까지 전시중이다. 마치 눈앞에서 종교적 영광과 기적이 재현되는 듯한 착각을 당대 사람들이 느꼈을 것 같은 그림이다. 옛날 그림을 볼 땐 엄청난 시각적인 홍수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과 뇌를 속일 필요가 있다.
#세비야 미술관
세비야 미술관은 그림을 좋아한다면 한 번 가볼만하다.
그림을 좋아하진 않지만 세비야를 여행할 때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도 가보면 좋다.
Merced Calzada 수도회(이 수도회도 재미난 역사가 있을 것 같다. 세비야의 레콩키스타가 끝난 직후인 1248년 설립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가 사용했던 건물로 현재의 모습은 17세기에 재건축된 형태이다. 이미 1841년부터 미술관으로써 대중에게 공개된 곳.
넓지 않은 미술관은 2-3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날씨가 좋으면 파티오(중앙 정원) 회랑에 놓인 벤치에 앉아 멍때리는 것도 좋다.
이 미술관은 이전에도 가본적이 있는데, 갈 때마다 주로 0층만 집중적으로 보고 1층은 그림 사이를 산책하듯 훌렁~ 보게 되는 것 같다. 0층에서 이미 에너지를 다 써서이기도 하고, 그림을 보는 개인의 취향 문제때문이기도 하고... 1층에서는 몇 개의 작품 앞에서 걸음이 멈춰지지만 딱 그 정도가 내 취향이다. 가본데를 왜 또 가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내게 그림은 우연히 펼친 시집처럼 그 때 그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데? 가 내 대답.
0층은 15세기 아직 고딕의 흔적이 남은 세비야 회화와 조각부터 르네상스, 매너리즘, 그리고 무리요와 세비야 바로크 회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1층은 세비야 바로크 회화~20세기 회화까지 3세기에 걸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1층 전시실에서 이번에 내 발걸음을 잡은 그림 몇 점은
*담배 공장 작업자들을 그린 그림. 이 그림 앞에서 일을 하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는 여인들의 일과를 상상해봤다. 오페라 <카르멘>에 나온 주인공 카르멘을 찾아봤다. 카르멘은 그저 팜프파탈이었을까? 소위 '못된년'일까? 남자 작가의 시선에서 그리니까 그렇게 나온건 아닐까. 팍팍한 삶에서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사랑을 찾고자 했던 당찬 여성 아니었을까.
*투우 마에스트로의 죽음을 그린 그림. 개개인의 감정을, 마에스트로와의 관계에 대한 드라마를 써본다.
*바이올린을 든 거리의 소년을 그린 그림. 너무나도 어린 소년이 이런 제목으로 묘사되어 있다는게 찡했다. 그저 모델이 되었을 그 아이의 생이 춥지만은 않았기를 가만히 바라보기도 한다.
세비야 미술관의 입장료는 1.5유로, 소장하고 있는 작품에 비하면 정말 말도 안되는 가격이다.
인기가 없어서인지 붐비는 곳도 아니다. ㅎㅎ
미술관 입구 바로 앞에 작은 광장/공원이 있는데 무리요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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