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하] day2. 지구는 둥그니까 계속 걷다보면, 페트라

2019. 12. 24. 07:14호랑방탕 가사탕진 여행/요르단 2019 크리스마스


어제의 나는 서서 졸았던 나를 금세 잊고, 날이 밝으면 부지런함을 획득하고 쌩쌩한 체력을 갱신한 내가 아침 7시에 눈을 떠 차를 한 잔 마시고 아침밥을 사먹고 8시 30분에는 알카즈네 앞에 서있을 거라 믿었다. 일찍 문을 여는 레스토랑을 검색하며, 뭐야 다들 일러도 8시 오픈이네, 페트라가 6시부터 오픈인데 장사할 마음이 없는거지! 라고 타박을 하며.. (마음속 깊은 곳의 나는 안도했던거 같기도 하고)

일어난 시간은 오전 10시. 비행기를 놓쳐 두바이 공항 18시간 대기부터 암만 공항 노숙까지 고생고생한 일행이 드디어 페트라에 도착해 함께 아점을 푸짐하게 먹고 “오늘은 앗데이르까지!”를 외치며 페트라 입구를 지난건 12시. 어제에 이어 오늘의 페트라가 시작되었다.
시크는 다시 걸어도 멋지다. 동행과 함께 걸으니 특이한 무늬, 2천년의 세월동안 닳아 희미해진 조각 등을 찾는 재미가 두배! 역시나 어제처럼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을때 알카즈네가 덜컥 나타났고, 우연히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 요즘 인스타 핫플이라는데서 기념샷도 남겼다.

오늘 우리의 목표는 “일단 앗데이르”! 늦게 입장했으니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앗데이르까지는 가보고 싶었다. 페트라의 서북쪽에 구백구십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는 거대한 사원 앗데이르까지 가는길에 마주치는 모든 방문지를 패스하는 것이 전략. 어차피 앗데이르에서 같은 길을 되돌아나와야 하니까 나올때 해가 아직 떠 있고, 체력이 허락하면 왕들의 무덤이든 님파에움이랑 비잔틴 교회터든 가보자 하고 긴 여정을 떠났다.

알카즈네에서 도시 내부로 향하는 길을 찾아 파사드 거리를 지나면 공간이 확 트이면서 왼쪽에 반원형극장, 오른쪽 뒷편에 왕들의무덤이 촤르륵 펼쳐진다(*왕들의무덤 뒷편 알굽타 산을 한시간 오르면 알카즈네를 내려다볼 수 있는 뷰포인트). 왼편으로 꺾이며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면 오른편 언덕 위에 님파에움이 보이고 열주거리에 들어서면 오른편은 비잔틴 교회와 날개달린사자사원, 왼편에는 대사원과 정원&수영장 터가 있다. 그리고 구백개의 계단이 시작되기 전 왼편에 카스르알빈트가 유일하게 돌산을 깎아 만든것이 아닌 돌을 쌓아올려 지은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모든 곳에 안들어간건 아니고, 반원형극장이랑 대사원은 궁금해서 들어가봤다. 반원형극장은 입구에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이고 6천명 수용 규모에 아레나와 객석 첫줄 사이에 높이 차가 별로 없는 연회, 공연용 극장이었다. 성지순례객들도 많이 드나든 페트라에서 대규모 제례를 열기도 했단다. 대사원은 정치공간이었을거라 본다. 20세기 초, 여길 발굴했던 학자가 the great temple로 적어놓은게 그냥 이름이 되어버렸지만. 내부에 원형으로 스탠드가 죽 둘러친 공간이 있는데 의원들의 회의공간이 아니었을까 한다는.. 채색벽도 일부 남아 있고, 제자리를 찾지 못한 기둥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게 재밌다. 동네 애들은 제 키보다 세배는 되는 기둥 꼭대기에 맨발로 올라가 여행자들을 구경한다.

대사원 혹은 옆에 목욕탕 같은 터가 있는데, 거기 출신 기둥들
사진 찍어도 돼? 했더니 가만히 앉아 포즈를 취한다. 밀크캬라멜을 나눠먹었다

 

앗데이르 가는 길에는 당나귀&노새 호객꾼들이 많지만 별로 끈질긴 느낌은 아니다! 블로그에 끈질기다고 종종 써있던데 그냥 “노땡큐~” 하거나 “우리 그냥 걷고 싶어요~”하며 손 살짝 흔들어 표시했더니 그 다음부턴 대부분 안물어보시던데? 나... 돈이 없어 보였나; 모험심이 가득해 보였고 건강해 보였다고 하자. 호객하는 베두인들 좀 웃겼다. 동키나 홀스 원하냐고 묻기도 하지만 간혹 “너 택시/메르세데츠 원하니?” 라고 진지하게 묻는데 빵 터짐. 우리는 아직 체력도 짱짱했고, 당나귀든 낙타든 뭘 타더라도 평지에서 타자 싶어 결국 아무것도 타지 않았(고, 나이트페트라까지 총 삼만천보를 걸었다..)다.

 

구백계단을 걸어올라가는 힘듦이야 말해 무엇하리... 하지만 풍경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너무 멋졌고, 숨을 헉헉대며 동행과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힘들다 / 진짜 멋지다를 반복하며, 살랑 부는 바람에 땀도 식혀가며 걷다보면 쩌 위에 키세스 같이 깎은 항아리같은게 보이는데, 앗데이르가 곧 눈앞에 있다는 뜻이다. 구백개 계단을 너무나 압축해 말했지만 거긴별 도리없이 꾸준히 오르면 끝나는 오르막인거다(예?). 난 산을 넘어가야 앗데이르가 있는건줄 알았는데, 앗데이르는 그냥 산 위에 있다. 이 키세스를 발견했을 때 앗데이르 진짜 미쳤구나... 이 꼭대기에 있다고 진심? 하며 왠지 모르게 앗데이르에 애정이 뿜뿜..

사진이 담지 못하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있다. 진짜 멋진 곳

 

알카즈네보다 앗데이르가 훨씬 멋지다고 하는 후기를 종종 봤다. 둘다 멋진데, 구백계단의 노고가 앗데이르를 더 멋지게 하는 걸수도 있겠지만 앗데이르 진짜 멋지다. 그 위치, 주변의 분위기일까? 알카즈네의 연출이 무엇이 나올지 모를 시크의 끝에서 “어서와, 페트라는 처음이지? 이런거 처음봤지?” 느낌이라면 앗데이르는 페트라 모든 자연신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신성한 기분, 페트라의 완성은 여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파사드를 완전히 비출 때 딱 올라간 행운도 있었고... 찻집에서 수분보충을 하고 뒷편에 길 따라 가다 the best view cafe in the world라고 적힌 간판을 따라 조금 걸었는데 왠 구근식물이 잔뜩 심겨있고(이거이거 혹시 블랙아이리스? *찾아보니 drimia maritima 혹은 argenia maritima 라는 독성이 강하고 그래서 약재로도 쓰는 구근식물) 뒷편 산세가 훤히 보이는 풍경맛집이 나타난다. 카페까지는 안갔다. 멀다. 눈앞의 카페는 멀어서 안갔지만, 숙소 주인이 얘기해준 7시간 짜리 트레킹 루트가 있었는데(지프로 시작지점까지 이동, 앗데이르로 내려오는 루트), 그건 정말 해보고 싶어졌다. 아쉬워..

Drimia maritime, 가운데 길다랗게 대가 올라오는데, 가을에 하얀 꽃이 핀단다. 베두인들은 이 꽃이 지면 ‘아, 겨울이 오는구나’ 한단다

 

세시반 정도에 앗데이르에서 내려왔나보다. 겨울철 페트라는 아침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열고, 늦어도 5시까지는 빠져나오라고 안내한다. 부지런히 걸어 밖에 나오니 5시 20분 정도였는데, 해가 4시 40분에 지는데다 절벽과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금방 어두워진다. 랜턴 없고 핸드폰 배터리 없음 그냥 깜깜한 길을 걸어나와야 하는것. 별자리를 보며 방향을 파악할 수 있고 내 몸 하나쯤 지킬 수 있는 크리브마가 혹은 명상으로 체온을 올릴 수 있는 티벳 승려들의 수련법을 알고 있는게 아니라면 그냥 안내대로 하는게 최고.

아직 끝난게 아니다. 우리에게는 일주일에 세번만 볼 수 있는 페트라 by 나이트가 남아있었다. 동행들이 전날 너무 고생하셔서 페트라나이트는 나 혼자 볼 생각도 했는데, 씩씩하게 가시겠단다! 페트라나이트는 1인 17디나르 표를 따로 끊어야하고, 들어갈 때 페트라 낮 입장티켓을 보여줘야 한다고 티켓부스 직원이 그러길래(내 앞 외국인 두 팀도 같은 질문을 했다) 낮 입장티켓을 끊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나? 싶었는데 입구에서는 안 보여줘도 괜찮단다. 뭐지.. 여튼, 이걸 뭐라할까, 낭만적인 밤 산책에 알카즈네 양념을 치고 협곡 사이로 보이는 빼곡한 별들은 옛다 보너스 랄까. 알카즈네까지 가는 길에 은은한 조명을 깔아놨다. 사람이 한땀한땀 놓아둔 조명이 밤의 페트라를 찾은 사람들을 반기는 것 같다.

막판에 알카즈네에 요런 조명을 쏘기도

 

알카즈네 앞에 카펫을 깔아두고 사람들이 오는 순서대로 자리에 앉힌다. 음유시인같은 아저씨도 있고, 노래하는 분, 피리 연주하는 분이 공연을 한다. 음유시인 아저씨는 평화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앞자리부터 차를 갖다주는데, 미처 뒷자리까지 차 서빙이 되기 전에 공연이 끝나버린다. 페트라 바이 나이트는 알카즈네 건물을 보기 위한 시간이 아니다. 옛날처럼 전기가 없을 때 횃불이나 초로 밝혀졌을 밤의 시크를 직접 경험해보고, 그리고 협곡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에 빼곡한 별을 보는 시간이다. 시크에 물이 또르르 흐르는 소리와 함께 음악이 흐르고, 낮에 들었던 베두인의 피리 음악이 또 더해진다. 2천년 전과 공간이 겹쳐지는 것 같은, 그 기분을 느껴보는 시간이다.

 * * *

-페트라 곳곳에 화장실, 카페 있다. 화장실은 방문자센터 건물, 파사드 거리의 끝, 열주거리의 시작 등에 있고, 앗데이르 맞은편 카페 화장실은 1디나르로 유료.
안가봤는데, 카스르알빈트 맞은편 카페가 좋아보였다.

-페트라 by 나이트는 2주 쯤 전부터 저녁 7시 프로그램도 새로 생겼다. 일주일에 세 번 월, 수, 목에 19:00, 20:30 두번 운영. 요르단패스와 상관없이 1인당 17디나르 티켓 사야하고, 티켓 부스는 방문자 센터 건물에서 티켓 판매하는 곳 마주보고 오른쪽 끝(페트라 방향)에 따로 있다.
-앗데이르까지 가는건 보통의 체력이라면 쫌 힘드네~ 정도이지 미칠만큼 힘들지는 않다. 단 체력은 다들 다르기도 하고 컨디션이 좌우도 하고 등등 ㅎㅎ
-페트라 안에서 파는 먹을거리는 비싸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물건 갖고와서 파는거니 비쌀만도 하다. 물은 앗데이르 꼭대기에서도 1디나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