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그림일기> 정기용의 건축 아카이브전

2013. 3. 5. 07:14잔상들 (책,영화,전시 등)

국립현대미술관 2013.2.28 - 2013.9.22 



<말하는 건축가> 다큐멘터리로 우리나라 건축가 중에서는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건축가가 아닐까 싶다. 나 역시 말하는 건축가와 작년에 일민미술관에서 했던 전시로 알게 되고 지금 일하고 있는 하자센터 건물의 리노베이션을 담당했던 건축가라는 말에 더 친근감을 느꼈던 건축가가 정기용이다. 이제는 이름을 떠올리면 말년의 그 앙상한 얼굴과 모자, 다큐멘터리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 이동 침대에 누운 채 숲과 함께 있는 사람들을 감사해하고 감탄했던 그 모습이 아리게 그려진다. 






<그림일기> 건축 아카이브전은 건축가 정기용이 자신의 드로잉과 건축 모형 등의 자료를 국립현대에 기증한 걸 가지고 열게 되었다. 길죽한 전시실이 한가득 정기용의 선으로 채워져 있다. 한 사람의 삶이 이토록 많은 스케치와 아이디어 노트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다. 그 꼼꼼한 스케치에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건축가의 책임감과 사명감이 묻어 있는 듯 했다. 가령, '아이들이 놀기에는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놀이터'에 대한 스케치는 불어로 적혀 있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보기는 했지만,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즐거운 공간이 아닌 아이가 있는 가족의 구매력을 끌어오기 위해 놀이터를 고민없이 지은 주상복합단지 놀이터에 대한 건축가의 지적과 대안에 대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공동체의 대화를 단절시키는 주택계획' 역시 사람이 사는 마을에 들어선 주택의 기능을 상실한 주거공간에 대한 건축가의 신념을 표현한 것일거다. 


국립현대 전시에서는 <말하는 건축가> 정재은 감독이 찍은 건축가 말년의 대학강의가 5개 정도 상영되고 있다. 그 중에 집값과 땅값의 등가상각선에 대한 강의를 잠시 앉아서 보게 되었는데, 건축가가 단지 건물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에 대한 철학을 만들어내고 가치를 지켜나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등가상각(집값과 땅값이 같아지는 시점)이 건물을 지은지 30여년 정도가 되면 일어나고, 집을 리노베이션 하면 다시 집값이 올라 몇 년이 더 지나야 철거를 하는지 마는지 고민이 되는 시점이 발생하는데, 요즘 특히 우리나라처럼 땅값이 미친듯이 치솟는 곳에서는 집이란 언제든지 허물어버려도 관계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였다. 이게 단순히 가격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가치의 전복이 일어나게 됨을 암시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주택정책이 없다 라는 말씀도 하시며(이 강의는 2년 정도 전에 촬영된거라 지금과 상황이 조금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을거라 생각한다 ^^;) 99%의 주거건물 특히 아파트를 모두 상품으로 만드는데 다 지원해버리고 조금 미안하니까 옛다 하는 식으로 지은게 영세민 임대 주택이라는 거다. 표면적으로는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정책인 것 같지만 삶이라는 컨텍스트에서 집의 역할과 가치를 생각하지 않은 어떻게 보면 폭력적인 방식이라는 것(요건 내 생각. 건축가는 뭐, 강한 언어들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 문제에 직접적으로 폭력적이라는 단어를 쓴 건 아님). 일례로 영세민 임대 주택에 사는 아이들이 '쟤는 임대 주택에 사는 애' 라는 딱지에 얼마나 놀림과 상처를 받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고.. 소셜하우징에 대한 고민도 정책도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많은 생각이 들었던 전시였다. 그 많은 선들이 오고간 고민들을 바라보며 사회적기업에 다닌답시고 세상의 모든 불평등과 사회적 문제를 나만 고민하고 있어 라는 자만에 빠졌던 것 같아 반성했고 인간 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의식과 행동이 이토록 감동스러움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날 좋은 날, 다시 한 번 가서 5개의 강의영상을 모두 봐야겠다. 

올 봄에는 건축가가 감탄했던 그 등꽃을 보러 꼭 꼭 무주엘 가야겠다.